인터뷰
“교육농은 생태적인 것에 대한 예민성, 감성을 지닌 시민을 기르는 것”
- 박형일 농부, 채소생활
글 풀씨
▲농부 박형일. 뒤에 보이는 이는 교사농부 강주희. 박형일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그도 오랜만에 이야기 나누고 싶다며 같이 내려왔다. 《오늘의 교육》 4호(2011년 9+10월호)에서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의 교육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특집으로 제언되었던 걸 기억하실 것이다. 이를 보고 교육농연구소를 꾸려 농사를 통한 교육을 고민하던 박형일이 연락을 해 왔고 이듬해 2012년 ‘농사학림’을 시작으로 함께하고 있다.
교사농부들을 만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학교 텃밭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년인데도 나와는 달리 앎이 얕지 않다. 학습하고 전하는 ‘기술’이 상당하다. 매일 학교 텃밭을 돌보겠기에 그렇기도 하겠다 싶으면서도 그것과는 또 달리 배우고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이 아주 잘 녹아든 느낌을 받는다.
돌아보면 처음 박형일 선생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농부라고 했으나, 나는 그에게서 좋은 교사의 느낌을 받았다. 농사와 교육의 조화, 좋은 농부이자 교사. 2012년부터 해마다 만나왔으니 10년. 한결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2021년 올해는 그 전까지와는 달리 좀 소원해진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사농부들의 학습장에 발길을 뚝 끊어 버렸으니까. 연초에 농부로서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선언(?)한 바 있으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채소생활을 잘 운영하는 데 집중했어요.”
교사농부들에게 농장은 견학 장소였지만, 박형일에겐 삶의 터전. 농장에 와서야 처음 본 다양한 종류의 채소들은 견학자들에겐 놀라운 경험이지만, 그에겐 생활비를 마련해 주는 상품. 하기에 농장의 채소들을 직거래와 온라인으로 유통시키는 노력을 해 왔고,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 매출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부분 이루어진단다. 팔로워가 9천이 넘는다고.

▲홍동면에 있는 채소생활. 입간판을 흑칠판으로 만들고 그림과 글씨로 소박한 멋을 냈다.
‘채소생활’의 인스타그램(vegelab)에서는 시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채소들을 보고 구입할 수 있다,는 서술은 느낌을 담지 못한다. 그래 봤자, 고추고 호박이고 당근이고 뭐 그렇겠지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채소가 지닌 매력과 신비, 재미와 의미”
“멋과 맛에 대한 탐구”
채소생활에 적혀 있는 글귀. 직접 방문해 보셔야 그가 채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풀어가는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농부로서 교육농과 함께해 왔는데, 나한테는 지속 가능하지가 않았다.”
농부로서, 자신이 주체가 돼 생업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앞으로도 꾸준히 교육농에 대한 고민을 만들고 풀어갈 수는 없겠다는 것이다. 마음은 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니. 농장인 채소생활에 집중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교육농은 삶의 생태적 전환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 방향에서 농업 기반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새 세대가 농업에 참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농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진로와 전망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었습니다.”
교육농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고 채소생활에 집중했다. 채소뿐만 아니라 그에 바탕한 디자인이나 생활재 가공품 등에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더 나아가 ‘채소생활 채소레슨’ 인스타그램(vegestory)도 열어 소비를 넘어 채소에 대해 배우려는 사람들을 생태와 연결하려고 일을 꾸미고 있단다.

▲어디선가 찾아온(?)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코가 까맣다고 ‘오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단다. 교사농부 강주희의 자녀 서후, 지후와 함께 잠깐 동안 친구 놀이를.
홍동 농부 박형일의 채소생활, 채소레슨은 모두 인스타그램이 매체다. 농부들에게 SNS 운영은 기본이 된 것 같다. 유튜브에도 농민들이 찍어 올리는 농사법 콘텐츠가 많다. 귀농귀촌 교육 커리큘럼에도 SNS 운영이 꼭 들어간다. 방문자 수를 셈한 수익도 있지만 강사들은 한결같이 무엇보다 생산물 유통 매체로서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채소생활에 집중하고 있으면서 딱 두 곳은 교육을 다닌다. 예산과 서산지역. 가까운 곳이어서 가능하다고.
“예산과 서산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농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분들은 학교와 어떻게 결합을 해야 할지 고민하시더라구요. 관심 있는 교사들이 있을까 궁금해하고요.”
교육을 농사를 통해 하자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이다. 순환의 관점으로 문명을 바라보고 농사를 지어온 분들이 꽤 있지만, 이것을 교육의 장으로 끌어온 역사는 짧다. 이런 형편에서 교사농부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을 만나는 것이 반갑다. 교육=학교라는 등식을 깰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삶을 만들어 가는 길을 넓힐 수 있다.
“교사들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하자는 거였고, 그것은 결국 좋은 삶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잖아요.”
그는 우리가 교육농을 발견해 왔다면 그를 노출하고 확산해야 한다고 한다. 커뮤니티로 머물지 않고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 고민하면 좋겠다는.
“교육농TV 같은 것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텍스트 중심에서 좀 더 유연하게 교육농을 전하는 형식을 다양화해야 합니다. 이는 교육농조합의 필요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죠. 교육농은 생태적인 것에 대한 예민성, 감성을 지닌 시민을 기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성장한 이가 생태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요.”
교육농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홍동을 방문했던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때와 달리 길도 번듯해지고 건물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디나 있는 일. 내 눈에 띄는 홍동의 변화는 이런 점이다. 그때는 풀무학교의 두드러져 보였다면, 지금은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일, 역할이 더 눈에 띈다. 그때는 학교가 일을 풀어가는 중심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른 단체나 조합들이 그런 일을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학교보다 마을 주민들이 벌이는 사업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마다 사람들의 일에 변화가 많은 것은 각종 사업들과 얽혀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농촌 지역에서 학교가 어떤 삶의 씨앗을 뿌려왔는지, 또 그 씨앗을 품은 이들은 어떻게 발아해 마을을 만들어가는지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한 곳. 앞으로도 그 이야기는 끝날 것 같진 않다. 어쨌든 교육농도 이곳에 발 한짝을 걸치고 출발을 했으니.

▲오디. 2개월쯤 됐단다. 오디가 왔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정적으로 느껴지던 채소생활의 분위기가 명랑하게 바뀐 것 같다.
인터뷰
“교육농은 생태적인 것에 대한 예민성, 감성을 지닌 시민을 기르는 것”
- 박형일 농부, 채소생활
글 풀씨
▲농부 박형일. 뒤에 보이는 이는 교사농부 강주희. 박형일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그도 오랜만에 이야기 나누고 싶다며 같이 내려왔다. 《오늘의 교육》 4호(2011년 9+10월호)에서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의 교육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특집으로 제언되었던 걸 기억하실 것이다. 이를 보고 교육농연구소를 꾸려 농사를 통한 교육을 고민하던 박형일이 연락을 해 왔고 이듬해 2012년 ‘농사학림’을 시작으로 함께하고 있다.
교사농부들을 만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학교 텃밭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년인데도 나와는 달리 앎이 얕지 않다. 학습하고 전하는 ‘기술’이 상당하다. 매일 학교 텃밭을 돌보겠기에 그렇기도 하겠다 싶으면서도 그것과는 또 달리 배우고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이 아주 잘 녹아든 느낌을 받는다.
돌아보면 처음 박형일 선생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농부라고 했으나, 나는 그에게서 좋은 교사의 느낌을 받았다. 농사와 교육의 조화, 좋은 농부이자 교사. 2012년부터 해마다 만나왔으니 10년. 한결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2021년 올해는 그 전까지와는 달리 좀 소원해진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사농부들의 학습장에 발길을 뚝 끊어 버렸으니까. 연초에 농부로서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선언(?)한 바 있으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채소생활을 잘 운영하는 데 집중했어요.”
교사농부들에게 농장은 견학 장소였지만, 박형일에겐 삶의 터전. 농장에 와서야 처음 본 다양한 종류의 채소들은 견학자들에겐 놀라운 경험이지만, 그에겐 생활비를 마련해 주는 상품. 하기에 농장의 채소들을 직거래와 온라인으로 유통시키는 노력을 해 왔고,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 매출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부분 이루어진단다. 팔로워가 9천이 넘는다고.
▲홍동면에 있는 채소생활. 입간판을 흑칠판으로 만들고 그림과 글씨로 소박한 멋을 냈다.
‘채소생활’의 인스타그램(vegelab)에서는 시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채소들을 보고 구입할 수 있다,는 서술은 느낌을 담지 못한다. 그래 봤자, 고추고 호박이고 당근이고 뭐 그렇겠지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채소가 지닌 매력과 신비, 재미와 의미”
“멋과 맛에 대한 탐구”
채소생활에 적혀 있는 글귀. 직접 방문해 보셔야 그가 채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풀어가는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농부로서 교육농과 함께해 왔는데, 나한테는 지속 가능하지가 않았다.”
농부로서, 자신이 주체가 돼 생업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앞으로도 꾸준히 교육농에 대한 고민을 만들고 풀어갈 수는 없겠다는 것이다. 마음은 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니. 농장인 채소생활에 집중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교육농은 삶의 생태적 전환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 방향에서 농업 기반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새 세대가 농업에 참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농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진로와 전망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었습니다.”
교육농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고 채소생활에 집중했다. 채소뿐만 아니라 그에 바탕한 디자인이나 생활재 가공품 등에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더 나아가 ‘채소생활 채소레슨’ 인스타그램(vegestory)도 열어 소비를 넘어 채소에 대해 배우려는 사람들을 생태와 연결하려고 일을 꾸미고 있단다.
▲어디선가 찾아온(?)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코가 까맣다고 ‘오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단다. 교사농부 강주희의 자녀 서후, 지후와 함께 잠깐 동안 친구 놀이를.
홍동 농부 박형일의 채소생활, 채소레슨은 모두 인스타그램이 매체다. 농부들에게 SNS 운영은 기본이 된 것 같다. 유튜브에도 농민들이 찍어 올리는 농사법 콘텐츠가 많다. 귀농귀촌 교육 커리큘럼에도 SNS 운영이 꼭 들어간다. 방문자 수를 셈한 수익도 있지만 강사들은 한결같이 무엇보다 생산물 유통 매체로서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채소생활에 집중하고 있으면서 딱 두 곳은 교육을 다닌다. 예산과 서산지역. 가까운 곳이어서 가능하다고.
“예산과 서산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농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분들은 학교와 어떻게 결합을 해야 할지 고민하시더라구요. 관심 있는 교사들이 있을까 궁금해하고요.”
교육을 농사를 통해 하자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이다. 순환의 관점으로 문명을 바라보고 농사를 지어온 분들이 꽤 있지만, 이것을 교육의 장으로 끌어온 역사는 짧다. 이런 형편에서 교사농부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을 만나는 것이 반갑다. 교육=학교라는 등식을 깰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삶을 만들어 가는 길을 넓힐 수 있다.
“교사들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하자는 거였고, 그것은 결국 좋은 삶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잖아요.”
그는 우리가 교육농을 발견해 왔다면 그를 노출하고 확산해야 한다고 한다. 커뮤니티로 머물지 않고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 고민하면 좋겠다는.
“교육농TV 같은 것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텍스트 중심에서 좀 더 유연하게 교육농을 전하는 형식을 다양화해야 합니다. 이는 교육농조합의 필요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죠. 교육농은 생태적인 것에 대한 예민성, 감성을 지닌 시민을 기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성장한 이가 생태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요.”
교육농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홍동을 방문했던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때와 달리 길도 번듯해지고 건물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디나 있는 일. 내 눈에 띄는 홍동의 변화는 이런 점이다. 그때는 풀무학교의 두드러져 보였다면, 지금은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일, 역할이 더 눈에 띈다. 그때는 학교가 일을 풀어가는 중심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른 단체나 조합들이 그런 일을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학교보다 마을 주민들이 벌이는 사업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마다 사람들의 일에 변화가 많은 것은 각종 사업들과 얽혀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농촌 지역에서 학교가 어떤 삶의 씨앗을 뿌려왔는지, 또 그 씨앗을 품은 이들은 어떻게 발아해 마을을 만들어가는지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한 곳. 앞으로도 그 이야기는 끝날 것 같진 않다. 어쨌든 교육농도 이곳에 발 한짝을 걸치고 출발을 했으니.
▲오디. 2개월쯤 됐단다. 오디가 왔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정적으로 느껴지던 채소생활의 분위기가 명랑하게 바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