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민의 희생이 아니라, 저항을 이야기하자”
- 5월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 이야기
최은숙
cesv1003@daum.net
교육공동체 벗 이사장
올해도 5월에는 5.18 기행과 결합한 이사회를 하게 되었다. 지난 2년간은 정부의 전염병으로 인한 거리 두기 때문에 이사들도 일부만 묘역 참배를 해 왔지만, 올해는 그 방침이 해제되어서 25명 가량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참여를 하였다. 사무국에서 12시 30분쯤 송정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내려온대서 나도 기차를 탈까 했는데 송정을 거쳐 나주, 목포로 가는 KTX는 전주역을 지나가지 않아서 그냥 차를 갖고 광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분들을 태워 가기 위해 광주송정역으로 출발했다.
혼자 운전하고 내려가는 길이 다소 지루하기도 했지만 싱그러운 녹음과 눈부시게 하얀 꽃들을 보며 가는 길이 즐겁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게 될 사람들이 미리 반가운 마음이어서 혼자 운전하며 가는 길이 더 괜찮았던 것 같다. 집에서 여유있게 출발한 덕에 광주 송정역에는 12시 20분이 못 되어서 도착했다. 기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서 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카톡 메시지를 남기고 차를 세워뒀다. 주정차 단속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다른 차들도 많이 정차하고 있길래 그냥 버티며 차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던 중 배이 선생님이 전화해서 오는 중이라고 하셨다. 40분이 넘어서 도착하신다기에 배이 선생님 차를 타실 분들은 좀 기다리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오신 분들이 40분이 넘어서 나와서 바로 차를 나눠타고 배이 선생님이 추천한 식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내려온 분들 중 김기언(풀씨) 사무국장과 가족과 함께 온 정용주 조합원 가족은 배이 선생님 차를 타기로 하고 내 차에는 채효정 , 한학범, 그리고 김주영(수인) 이렇게 세 분 선생님이 탔다. 식당으로 가는데 토요일이어서인지 길이 좀 밀렸다. 15분 넘게 걸려서 도착하니 주차장이 넓고 정원을 예쁘게 가꿔 놓은 식당이었다. 여러 종류의 장미가 심겨 있는데 모양이 남다르고 예쁘기도 한 장미가 있어 사진을 찍어 뒀다. 기회가 되면 길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국장을 시켜서 먹는데 밑반찬도 맛있고 청국장도 맛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와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다.

▲ 망월동 묘역 표석.
가면서 일행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전직 교사, 내 차에 탄 셋 중 두 분은 현직 교사여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집에 가는 주말 교사들이 자기 버스비 내주지 않았다고 월요일 조회 시간에 화내는 교장 등 이해하기 힘든 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망월묘역에 도착했다. 구묘역 후문 쪽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바람이 꽤 차갑게 불어 겉옷을 챙겨 입고 들어갔다. 다른 분들이 보이지 않아 풀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매점 앞에 모여있다고 했다. 봄비갠후, 공현, 난다, 비비새시 등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거리 두기 방역 지침이 풀려서 지난해보다 많은 분들이 오지 않았나 싶었다.

▲ 위르겐 힌츠페터 묘석.
해마다 안내를 맡는 배이 선생님을 따라 묘역으로 들어갔다. 묘소 몇 군데를 이동하면서 해당 희생자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데 워낙 많은 분들이 묻혀 있다 보니 해마다 그 주인공이 달라진다. 먼저 매점 바로 옆에 있는 묘석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광주항쟁의 진상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묘석이었다. 고인은 세상을 뜨기 전에 자신이 사망하면 망월 묘역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시신의 입국 절차가 복잡하여 본 시신은 독일에 두고 유전자 감식이 가능한 손톱 등을 묻어 두었다고 했다. 우선은 이곳에 자리 잡았지만 입구이고 매점 화장실이 가까워 장차 좋은 자리를 찾아 옮길 예정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1980년 당시 계엄군과 맞서 싸우다 행방불명 되신 65인 중 29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함께 합시다.” 영정 안내 글.
그다음에는 실종자 사진을 모아 놓은 진열장 앞에서 이야기를 하였다. 5.18 사망자, 실종자 등에 대한 정리를 진행할 때 실종자 신청은 400여 명이었지만 실종자로 인정된 경우는 불과 6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오래전 뉴스가 생각났다. 5월민중항쟁이 있던 1980년 광주시의 1년 사망자 발표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억엔 그 숫자가 198명이었고 그 숫자는 별다른 일이 없던 다른 해의 사망자 숫자와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어서 거짓 발표 논란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목격한 사망자만 해도 그 숫자가 되고도 남지 않나 생각했었다. 400여 명의 실종자 신고가 있었으나 60명 정도만 인정이 된 것은 배상, 보상 문제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무명열사의 묘로 묻었다가 나중에 유전자 감식으로 누군인지 찾은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설명을 듣는데 대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참배하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치고 한쪽에서는 쉬곤 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이 된 문재학 열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읽은 지 몇 년이 지나 내용이 가물가물한 소설이 되어 버렸다. 중학교 3학년인 열사는 자신의 친구가 먼저 죽어서 그 시신의 처리에 함께하면서 합류하게 되었고 도청에서 최후까지 있다가 진압군의 총에 죽었다고 했다.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설명을 듣는데 대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참배하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치고 한쪽에서는 쉬곤 했다. 요즘 대학생이 예전만 못 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마다 5월이면 망월동을 찾아와 참배를 하고 5월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민주, 자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다지는 모습에 뭔가 안심이... 목청껏 열심히 노래를 하던 학생들 한 무리가 노래가 절정에 다다를 때 고음을 내지 못하고 한 옥타브 내려 부르는 것에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 이제는 저항했던 시민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그 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안내를 하며 배이 선생님은 지금까지 우리는 무고한 희생자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저항했던 시민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군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도청에서 최후까지 계엄군을 맞이 하면서 총을 갖고는 있었지만 계엄군을 향해 총 한 방도 쏘지 않고 죽은 28명을 포함한 시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라 예상된 27일 밤, 항쟁의 지도부였던 사람들, 대학교 학생회장들은 죽음을 피해 도청을 떠났다. 그러나 200명이 넘는 평범한 시민들이 도청에 남이 지키다가 죽고 끌려갔다. 우리는 그 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선생님들께서 학교에 가셔서 아이들에게 5.18을 가르치실 때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셔야 한다, 힘을 주어 이야기하였다.

▲ 깔끔하게 단장되고 정비된 신묘역이 엄숙한 분위기는 있으나 항쟁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은 그 때문인가.
구묘역을 둘러본 후 신묘역으로 넘어갔다. 신묘역은 국립묘지로 관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현수막을 달거나 구호를 외치거나 하면 안 되는, 경건하게 참배만 해야 되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깔끔하게 단장되고 정비된 신묘역이 엄숙한 분위기는 있으나 항쟁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은 그 때문인가. 신묘역에는 사망 순서대로 자리를 잡아 5.18 첫 희생자인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의 무덤이 첫 번째 자리였다. 신묘역에는 5.18 당시 사망자와 진압이 끝나고 잡혀서 고문 등으로 병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들도 차례로 묻혔고 5.18에 관계 있는 분들뿐 아니라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된 분, 기여한 분들도 같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는 전교조 초대 위원장 윤영규 선생님, 한겨레 신문 초대 대표 송건호 선생님, 우리 시대의 사상가 리영희 선생님도 계셨다. 신묘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배를 하고 있었다.

▲ 금남로 집회.
묘역 참배를 마치고 벗 이사회를 하기 위해 구도청 쪽으로 이동하였다. 아시아문화의 전당 옆에 있는 오월미술관 건물 5층에서 회의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미술관 전시 작품을 잠깐 관람하였다. 전시된 작품들에 담긴 오월 항쟁의 모습을 둘러 보면서도 가슴이 쓰라렸다. 전시관을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금남로에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 보니 집회는 막바지인 듯 절정의 모습이었다. 오십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학생들이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하고 있었고 무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며 같이 참여하고 있었다. 묘역에서 본 대학생들도 여럿 보였다. 묘역 참배를 하고 집회까지 참여를 하는구나.

▲ 5.18자유공원. 트럭 뒤에 보이는 건물이 5.18교육관.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밤공기가 너무나 차가워 얼른 숙소로 발길을 서둘렀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추위가 가셔서 살 것 같았다. 숙소는 작년에는 왔었던 5.18교육관이었다. 숙소에 들어간 시간이 아홉시가 넘었는데 숙소 뒤쪽의 골프 연습장에는 불이 환하고 많은 사람들이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묘역을 참배하였던 조합원 중에 참배 후 각자 여정으로 이동한 사람들도 있었고 5.18교육관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풀씨, 한학범 선생님과 편의점을 찾아가 간단한 간식거리와 마실 것을 사서 교육관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오니 강연을 하러 가셨던 채효정 선생님이 돌아와 열쇠가 없어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풀씨가 미안해 하며 열쇠를 찾아 건넸다. 채효정 선생님 강연을 들은 사람이 줬다는 빵도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참가자들을 잠시 한 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피곤해서 먼저 일어섰다. 나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매우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잠이 깨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두시 반쯤이었다. 다들 잘 시간이라 두통약을 구하러 가지 못 하고 누워 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잠이 들지 않았다. 다섯시가 넘어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플까? 설마 코로나인가 걱정도 되었다.

▲5.18자유공원 전경.
아침 여덞 시가 넘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모여서 숙소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한 후 짐을 차에 넣고 숙소 옆에 있는 5.18자유공원을 둘러 봤다. 이곳은 육군 교육 시설인 상무대가 있던 자리로 5.18교육관을 포함해 40만 평 정도의 넓이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개발하면서 518 당시 군사재판 시설물만 겨우 지켜서 남겨 놓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시민군들이 수용돼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곳저곳에 그때 당시를 재현해 놓은 조형물들이 있었다. 그 조형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작년과 달리 이곳에 수용됐던 분들이 군복을 입고 곤봉을 들고 안내도 하고 있었는데 때에 따라서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때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도 힘드실 텐데도 5월 행사 방문객들을 위해 그렇게 한다 하니 마음이 안쓰러웠다. 당시를 좀 더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힘드신 분들께 그런 역할을 하시게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내가 지금 준비 중인 북스테이의 이름을 ‘빵과 장미’라고 지을 예정이다. 식당 마당에서 만난 장미.
그렇게 둘러보고 이동해 아점을 먹으면서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송정 쪽에 ‘빵과 장미’라는 빵집이 있다는데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준비 중인 북스테이의 이름을 ‘빵과 장미’라고 지을 예정이고 그 빵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있어서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채효정 선생님이 어제 받아온 빵이 그 집의 빵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실 분들이랑 송정역으로 갔는데 시간이 아직 있어서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좀 나누다 기차를 타실 분들은 가시고 나는 빵과 장미를 찾아 갔는데, 헉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땐 일요일에 문연다고 되어 있더니,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그게 너무 오래된 정보였든가 했겠지. 그렇게 헛탕치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음…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풀씨가 그랬던 것처럼 오월미술관 방명록에 정용주 선생님께서 쓰신 글귀로 마무리할까 한다.
그날의 고통 앞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기념 너머 다시 달려야 할 변곡점은 점점 멀어진다.
나는 기억하며 퇴행한다.
기념 너머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파멸, 폭력과 마주하자.
다시, 아니 언제나 오월이다.
“이제, 시민의 희생이 아니라, 저항을 이야기하자”
- 5월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 이야기
최은숙
cesv1003@daum.net
교육공동체 벗 이사장
올해도 5월에는 5.18 기행과 결합한 이사회를 하게 되었다. 지난 2년간은 정부의 전염병으로 인한 거리 두기 때문에 이사들도 일부만 묘역 참배를 해 왔지만, 올해는 그 방침이 해제되어서 25명 가량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참여를 하였다. 사무국에서 12시 30분쯤 송정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내려온대서 나도 기차를 탈까 했는데 송정을 거쳐 나주, 목포로 가는 KTX는 전주역을 지나가지 않아서 그냥 차를 갖고 광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분들을 태워 가기 위해 광주송정역으로 출발했다.
혼자 운전하고 내려가는 길이 다소 지루하기도 했지만 싱그러운 녹음과 눈부시게 하얀 꽃들을 보며 가는 길이 즐겁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게 될 사람들이 미리 반가운 마음이어서 혼자 운전하며 가는 길이 더 괜찮았던 것 같다. 집에서 여유있게 출발한 덕에 광주 송정역에는 12시 20분이 못 되어서 도착했다. 기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서 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카톡 메시지를 남기고 차를 세워뒀다. 주정차 단속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다른 차들도 많이 정차하고 있길래 그냥 버티며 차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던 중 배이 선생님이 전화해서 오는 중이라고 하셨다. 40분이 넘어서 도착하신다기에 배이 선생님 차를 타실 분들은 좀 기다리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오신 분들이 40분이 넘어서 나와서 바로 차를 나눠타고 배이 선생님이 추천한 식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내려온 분들 중 김기언(풀씨) 사무국장과 가족과 함께 온 정용주 조합원 가족은 배이 선생님 차를 타기로 하고 내 차에는 채효정 , 한학범, 그리고 김주영(수인) 이렇게 세 분 선생님이 탔다. 식당으로 가는데 토요일이어서인지 길이 좀 밀렸다. 15분 넘게 걸려서 도착하니 주차장이 넓고 정원을 예쁘게 가꿔 놓은 식당이었다. 여러 종류의 장미가 심겨 있는데 모양이 남다르고 예쁘기도 한 장미가 있어 사진을 찍어 뒀다. 기회가 되면 길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국장을 시켜서 먹는데 밑반찬도 맛있고 청국장도 맛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와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다.
▲ 망월동 묘역 표석.
가면서 일행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전직 교사, 내 차에 탄 셋 중 두 분은 현직 교사여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집에 가는 주말 교사들이 자기 버스비 내주지 않았다고 월요일 조회 시간에 화내는 교장 등 이해하기 힘든 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망월묘역에 도착했다. 구묘역 후문 쪽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바람이 꽤 차갑게 불어 겉옷을 챙겨 입고 들어갔다. 다른 분들이 보이지 않아 풀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매점 앞에 모여있다고 했다. 봄비갠후, 공현, 난다, 비비새시 등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거리 두기 방역 지침이 풀려서 지난해보다 많은 분들이 오지 않았나 싶었다.
▲ 위르겐 힌츠페터 묘석.
해마다 안내를 맡는 배이 선생님을 따라 묘역으로 들어갔다. 묘소 몇 군데를 이동하면서 해당 희생자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데 워낙 많은 분들이 묻혀 있다 보니 해마다 그 주인공이 달라진다. 먼저 매점 바로 옆에 있는 묘석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광주항쟁의 진상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묘석이었다. 고인은 세상을 뜨기 전에 자신이 사망하면 망월 묘역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시신의 입국 절차가 복잡하여 본 시신은 독일에 두고 유전자 감식이 가능한 손톱 등을 묻어 두었다고 했다. 우선은 이곳에 자리 잡았지만 입구이고 매점 화장실이 가까워 장차 좋은 자리를 찾아 옮길 예정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1980년 당시 계엄군과 맞서 싸우다 행방불명 되신 65인 중 29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함께 합시다.” 영정 안내 글.
그다음에는 실종자 사진을 모아 놓은 진열장 앞에서 이야기를 하였다. 5.18 사망자, 실종자 등에 대한 정리를 진행할 때 실종자 신청은 400여 명이었지만 실종자로 인정된 경우는 불과 6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오래전 뉴스가 생각났다. 5월민중항쟁이 있던 1980년 광주시의 1년 사망자 발표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억엔 그 숫자가 198명이었고 그 숫자는 별다른 일이 없던 다른 해의 사망자 숫자와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어서 거짓 발표 논란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목격한 사망자만 해도 그 숫자가 되고도 남지 않나 생각했었다. 400여 명의 실종자 신고가 있었으나 60명 정도만 인정이 된 것은 배상, 보상 문제도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무명열사의 묘로 묻었다가 나중에 유전자 감식으로 누군인지 찾은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설명을 듣는데 대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참배하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치고 한쪽에서는 쉬곤 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이 된 문재학 열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읽은 지 몇 년이 지나 내용이 가물가물한 소설이 되어 버렸다. 중학교 3학년인 열사는 자신의 친구가 먼저 죽어서 그 시신의 처리에 함께하면서 합류하게 되었고 도청에서 최후까지 있다가 진압군의 총에 죽었다고 했다. 몇 군데를 옮겨다니며 설명을 듣는데 대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참배하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치고 한쪽에서는 쉬곤 했다. 요즘 대학생이 예전만 못 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마다 5월이면 망월동을 찾아와 참배를 하고 5월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민주, 자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다지는 모습에 뭔가 안심이... 목청껏 열심히 노래를 하던 학생들 한 무리가 노래가 절정에 다다를 때 고음을 내지 못하고 한 옥타브 내려 부르는 것에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 이제는 저항했던 시민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그 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안내를 하며 배이 선생님은 지금까지 우리는 무고한 희생자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저항했던 시민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군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도청에서 최후까지 계엄군을 맞이 하면서 총을 갖고는 있었지만 계엄군을 향해 총 한 방도 쏘지 않고 죽은 28명을 포함한 시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라 예상된 27일 밤, 항쟁의 지도부였던 사람들, 대학교 학생회장들은 죽음을 피해 도청을 떠났다. 그러나 200명이 넘는 평범한 시민들이 도청에 남이 지키다가 죽고 끌려갔다. 우리는 그 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선생님들께서 학교에 가셔서 아이들에게 5.18을 가르치실 때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셔야 한다, 힘을 주어 이야기하였다.
▲ 깔끔하게 단장되고 정비된 신묘역이 엄숙한 분위기는 있으나 항쟁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은 그 때문인가.
구묘역을 둘러본 후 신묘역으로 넘어갔다. 신묘역은 국립묘지로 관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현수막을 달거나 구호를 외치거나 하면 안 되는, 경건하게 참배만 해야 되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깔끔하게 단장되고 정비된 신묘역이 엄숙한 분위기는 있으나 항쟁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은 그 때문인가. 신묘역에는 사망 순서대로 자리를 잡아 5.18 첫 희생자인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의 무덤이 첫 번째 자리였다. 신묘역에는 5.18 당시 사망자와 진압이 끝나고 잡혀서 고문 등으로 병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들도 차례로 묻혔고 5.18에 관계 있는 분들뿐 아니라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된 분, 기여한 분들도 같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는 전교조 초대 위원장 윤영규 선생님, 한겨레 신문 초대 대표 송건호 선생님, 우리 시대의 사상가 리영희 선생님도 계셨다. 신묘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배를 하고 있었다.
▲ 금남로 집회.
묘역 참배를 마치고 벗 이사회를 하기 위해 구도청 쪽으로 이동하였다. 아시아문화의 전당 옆에 있는 오월미술관 건물 5층에서 회의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미술관 전시 작품을 잠깐 관람하였다. 전시된 작품들에 담긴 오월 항쟁의 모습을 둘러 보면서도 가슴이 쓰라렸다. 전시관을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금남로에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 보니 집회는 막바지인 듯 절정의 모습이었다. 오십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학생들이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하고 있었고 무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며 같이 참여하고 있었다. 묘역에서 본 대학생들도 여럿 보였다. 묘역 참배를 하고 집회까지 참여를 하는구나.
▲ 5.18자유공원. 트럭 뒤에 보이는 건물이 5.18교육관.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밤공기가 너무나 차가워 얼른 숙소로 발길을 서둘렀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추위가 가셔서 살 것 같았다. 숙소는 작년에는 왔었던 5.18교육관이었다. 숙소에 들어간 시간이 아홉시가 넘었는데 숙소 뒤쪽의 골프 연습장에는 불이 환하고 많은 사람들이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묘역을 참배하였던 조합원 중에 참배 후 각자 여정으로 이동한 사람들도 있었고 5.18교육관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풀씨, 한학범 선생님과 편의점을 찾아가 간단한 간식거리와 마실 것을 사서 교육관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오니 강연을 하러 가셨던 채효정 선생님이 돌아와 열쇠가 없어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풀씨가 미안해 하며 열쇠를 찾아 건넸다. 채효정 선생님 강연을 들은 사람이 줬다는 빵도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참가자들을 잠시 한 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피곤해서 먼저 일어섰다. 나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매우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잠이 깨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두시 반쯤이었다. 다들 잘 시간이라 두통약을 구하러 가지 못 하고 누워 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잠이 들지 않았다. 다섯시가 넘어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플까? 설마 코로나인가 걱정도 되었다.
▲5.18자유공원 전경.
아침 여덞 시가 넘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모여서 숙소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한 후 짐을 차에 넣고 숙소 옆에 있는 5.18자유공원을 둘러 봤다. 이곳은 육군 교육 시설인 상무대가 있던 자리로 5.18교육관을 포함해 40만 평 정도의 넓이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개발하면서 518 당시 군사재판 시설물만 겨우 지켜서 남겨 놓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시민군들이 수용돼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곳저곳에 그때 당시를 재현해 놓은 조형물들이 있었다. 그 조형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작년과 달리 이곳에 수용됐던 분들이 군복을 입고 곤봉을 들고 안내도 하고 있었는데 때에 따라서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때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도 힘드실 텐데도 5월 행사 방문객들을 위해 그렇게 한다 하니 마음이 안쓰러웠다. 당시를 좀 더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힘드신 분들께 그런 역할을 하시게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내가 지금 준비 중인 북스테이의 이름을 ‘빵과 장미’라고 지을 예정이다. 식당 마당에서 만난 장미.
그렇게 둘러보고 이동해 아점을 먹으면서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송정 쪽에 ‘빵과 장미’라는 빵집이 있다는데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준비 중인 북스테이의 이름을 ‘빵과 장미’라고 지을 예정이고 그 빵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있어서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채효정 선생님이 어제 받아온 빵이 그 집의 빵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실 분들이랑 송정역으로 갔는데 시간이 아직 있어서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좀 나누다 기차를 타실 분들은 가시고 나는 빵과 장미를 찾아 갔는데, 헉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땐 일요일에 문연다고 되어 있더니,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그게 너무 오래된 정보였든가 했겠지. 그렇게 헛탕치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음…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풀씨가 그랬던 것처럼 오월미술관 방명록에 정용주 선생님께서 쓰신 글귀로 마무리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