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직장 생활 대부분을 말단으로 보냈다. 대학을 다녔던 똑똑했던 아버지의 사촌은 월북을 해 버렸다. 다행히도 취직한 직후였으나 승진의 길은 연좌제에 가로 막혀 버렸다. 이른 새벽 나뭇짐을 부려놓고 학교에 갔어도 월사금을 내지 못해 쫓겨나오기를 반복하다 겨우 얻은 직장이었다. 고교 졸업장은 그 돈을 다 내놓고서야 받아올 수 있었다는 얘기는 최근에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와는 정치적 의견을 나누기를 피하고 어쩌다 사안이 불거지면 서로 얼굴을 붉히고 큰소리를 내곤 한다. 아버지는 이명박이나 박근혜 얘기가 나오면 야당이나 여당이나 다 똑같다고 한다. 어찌 똑같단 말인가. 당신의 삶의 궤적 때문일까. 아버지 화살의 방향은 늘 정해져 있다. 당신도 제사를 간소화할 정도로 바뀌었는데, 이 정치적 입장 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현충원은 내겐 아버지의 정치적 맹목성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선열을 기린다는 민족주의 사관과도 불일치하는, 오히려 친일부역자들이 국가주의로 포장돼 안치된 이상한 곳. 그곳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한베평화재단에서 현충원 평화기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게 되었다.
나는 베트남전쟁 시기 미군이나 한국군의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민간인의 참혹한 주검을 보며 그 모습이 1980년 광주의 5월과 똑같다는 것에 많이 놀랐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이미 제주 4.3에서, 여순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도 있었다는 것에도. 최근에는 미얀마까지도. 시기도 나라도 다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 많은 군인들이 어떻게 이런 행위를 하게 될까. 다른 방법이 없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 그렇기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현충원을 찾게 되었는데 이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는 누구라도 죽을 수 있다. 죽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는 그 공포를 증오로, 적개심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늘 부딪히는 아버지의 정치적 맹목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그 공포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면서 자신의 친일부역행위를 지우고 총칼을 앞세운 독재자로서 장기집권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는 피해당사자이다. 그렇지만 당신을 옭아매었던 연좌제라는 울타리에서 풀려났으면서도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수록 박정희를, 독재와 전횡을, 반민주적 행태를 더욱 더 미워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또 아버지와 얼굴을 붉히게 되고...
현충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이들을 모신 국립묘지. 대전국립현충원은 보훈처에서 서울국립현충원은 국방부에서 관리한다. 관리 주체가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명해 계시는 보훈의 성지”로, 국립서울현충원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있는 민족의 성지”라고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전을 찾아 뜻을 조합하면 현충顯忠이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을 높이 드러낸다”는 뜻이니, 현충을 어떤 관점으로 드러내는가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전쟁무기를 중심으로 전시를 하고 있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이 국방부 소속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그 현충의 차이가 조금은 더 실감난다. (그 이름부터 좀 바꿔 봅시다. 세상에! 전쟁을 기념한다니...)
이번에 찾은 국립서울현충원은 그 부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어서 좀 놀랐다. 더러 승용차를 타고 추모를 하러 가는 이들이 눈에 띄어서 왜 저러나 싶었는데, 다니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현충원을 안내한 김학규(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님의 말씀 중 몇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살아서의 계급적 지위가 묘역 조성에도 그대로 반영돼 구역을 나누고 규모를 달리했다, 나라를 위한 뜻에 차별을 둔 것이니 고쳐야 한다.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했던 관리 주체에 따른 문제와도 결부돼 있다. 김 소장의 얘기는 이렇다.
“광주에 있는 5.18국립묘지에 당시 항쟁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시민들이 안장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5.18민주화운동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국립묘지에 묻여 있는 묘한 형국이다. 특히 계엄군 묘비 뒷면에 새겨진 ‘1980년 5월 ○○일 광주에서 전사’라는 부분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어서 정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는데, 40년만인 2020년 12월 28일 마침내 ‘순직’으로 변경된 묘비로 교체되었다. 또한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17계엄군의 묘비가 지난 40년간 ‘전사’라고 씌어 있어 역사 왜곡의 현장 역할을 했다면,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에 ‘순직’이라고 씌어 있는 묘비 역시 역사 왜곡의 현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경찰묘역에는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경국장으로 광주전남지역 치안 책임자 안병하 경무관이 안장돼 있다. “경찰이 더 이상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경찰에게 비무장을 지시했던 그는 신군부에게 고문과 강제 사직을 당하고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방침에 따라 경찰 기동대의 무기를 회수했던 이준규 목포경찰서장도 안장돼 있다. 그 역시 신군부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전사 연도별로 묻힌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의 묘비를 보면서는 기분이 착잡하다. 장인어른은 베트남 전쟁에서 생존해 돌아오셨으나 뇌출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고엽제 피해자로 약간의 국가 도움을 받았으나, 내가 당신과 쌓아가고 있었던 좋은 일들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백마부대로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 진실을 함께 찾고 싶었으나 고작 몇 장의 사진만 보았을 뿐이다. 물론 내가 아버지와 정치적 의견에 평행선을 긋고 있듯 장인어른과도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비록 얼굴을 붉히더라도 기회는 있었을 텐데... 전쟁은 그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빈 묫자리도 더러 보인다. 독립유공자로 묻혀 있다 가짜임이 드러나 파내 간 곳이다. 거짓과 조작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묘지를 이장해 가지 않는 뻔뻔한 이들도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 현장도 볼 수 있다. 남편과 동지로서 함께독립운동을 했는데 남편의 배우자로만 기록돼 합장된. 친일장교의 이력이 뚜렷하나 국군창설에 기용돼 장군까지 해먹은 이들도 눈에 띈다. 김학규 님은 “지금도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12명의 무덤이 있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기준으로는 74명의 친일파 무덤이 있다”고 한다.
현충원의 규모는 몇날 며칠을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크다. 이번 발걸음으로는 앞으로 탐방을 해야 할 동기를 얻은 셈이다. 다른 대통령의 무덤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크고 현충원 중심부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박정희의 묘는 다음에 가 보아야겠다. 김학규 님은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를 떠나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들의 죽음은 모두 고귀하다는 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조치로 이해된다며 미국은 대통령, 장군, 장교, 일반 사병 등 안장 대상자에게 4.49제곱미터라는 동일한 묘지 면적을 제공하고 있다”고 들려 주었다. 죽어서도 차별이라며 전면적인 차별 철폐가 필요하다고 덧붙이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에 따라 그 공동체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번에 현충원을 다녀오면서 다시 한번 느끼는 점이다.
- 풀씨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
한국전쟁 온라인 전시관을 소개드린다. 전쟁기념관이나 현충원은 현장학습지가 되기도 한다. 관람객은 국가주의 시각의 전시 서사에 그대로 노출된다. 전시물들, 전쟁무기, 기록들은 폭력과 공포, 죽음을 탈색시킨다. 관람객이 평화의 길로 들어서기는 쉽지 않다. 이와는 달리 아래 소개드리는 온라인 전시관은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마주한다. 전쟁과 평화는 나란히 설 수 없다. 전쟁은 나의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그것이 끝나서도 살아남은 자의 삶에 파고들어 전쟁의 공포를 왜곡하고 변주한다.
http://restricted.or.kr/

이 전시관은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에서 개설한 것이다.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전시 해설을 요청할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료이다. 온라인 전시관의 전시 취지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
흔히 전쟁 지도부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전쟁을 관찰한다고 간주한다. 회의실에 놓인 거대한 상황판 주변에 둘러앉아 작전과 대책을 논의하던 사람들. 그들이 상황판을 통해 바라보았던 전쟁의 모습이 그대로 국가의 공식기억이 되었다. 본 전시는 한국전쟁을 그러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망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쟁 지도부가 허락하지 않았던, 외면하려 했던 전쟁의 모습에 집중하려 했다.
1부 ‘불가능한 피란’에선 피란, 폭격, 학살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꾸렸다. 공산주의의 압제를 피해 떠난 ‘자유 피란민’이라고 치켜세워졌던 피란민들은 과연 길 위에서 어떤 ‘자유’의 모습을 만났을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량폭격의 모습은 스펙터클로 묘사되지만, 그 피폭지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국가는 어떻게 민간인학살과 같은 전쟁범죄의 가해자가 되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을 먼저 품고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의 고통을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전시의 내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2부는 ‘전쟁을 통과하는 10개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1부의 전시 내용에 보다 깊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와 1부에서 다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았다. 10개의 방의 이름은 각각 어떤 무덤, 남겨진 사람들, ‘부역자’, ‘위안부’, 어떤 폭격, 고지전, 노무자, 반란자1, 반란자2, 불러보는 이름이다. 전쟁을 통과한 이들의 흔적, 이름, 목소리, 얼굴, 필체 등은 그들이 홀로 감내해왔던 전쟁의 기억을 바깥으로 표출해낸 기록이자 ‘말 걸기’다. 우리가 그들 개개인의 기록을 마주하고, 읽고, 듣고, 감각하고, 거기에 응답한다면 그들의 기록은 우리의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디 본 전시가 그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목소리에 조금의 숨통이라도 터주기를 바란다. 그 목소리를 듣게 될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직장 생활 대부분을 말단으로 보냈다. 대학을 다녔던 똑똑했던 아버지의 사촌은 월북을 해 버렸다. 다행히도 취직한 직후였으나 승진의 길은 연좌제에 가로 막혀 버렸다. 이른 새벽 나뭇짐을 부려놓고 학교에 갔어도 월사금을 내지 못해 쫓겨나오기를 반복하다 겨우 얻은 직장이었다. 고교 졸업장은 그 돈을 다 내놓고서야 받아올 수 있었다는 얘기는 최근에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와는 정치적 의견을 나누기를 피하고 어쩌다 사안이 불거지면 서로 얼굴을 붉히고 큰소리를 내곤 한다. 아버지는 이명박이나 박근혜 얘기가 나오면 야당이나 여당이나 다 똑같다고 한다. 어찌 똑같단 말인가. 당신의 삶의 궤적 때문일까. 아버지 화살의 방향은 늘 정해져 있다. 당신도 제사를 간소화할 정도로 바뀌었는데, 이 정치적 입장 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현충원은 내겐 아버지의 정치적 맹목성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선열을 기린다는 민족주의 사관과도 불일치하는, 오히려 친일부역자들이 국가주의로 포장돼 안치된 이상한 곳. 그곳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한베평화재단에서 현충원 평화기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게 되었다.
나는 베트남전쟁 시기 미군이나 한국군의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민간인의 참혹한 주검을 보며 그 모습이 1980년 광주의 5월과 똑같다는 것에 많이 놀랐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이미 제주 4.3에서, 여순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도 있었다는 것에도. 최근에는 미얀마까지도. 시기도 나라도 다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 많은 군인들이 어떻게 이런 행위를 하게 될까. 다른 방법이 없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 그렇기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현충원을 찾게 되었는데 이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서는 누구라도 죽을 수 있다. 죽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는 그 공포를 증오로, 적개심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늘 부딪히는 아버지의 정치적 맹목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그 공포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면서 자신의 친일부역행위를 지우고 총칼을 앞세운 독재자로서 장기집권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는 피해당사자이다. 그렇지만 당신을 옭아매었던 연좌제라는 울타리에서 풀려났으면서도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수록 박정희를, 독재와 전횡을, 반민주적 행태를 더욱 더 미워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또 아버지와 얼굴을 붉히게 되고...
현충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이들을 모신 국립묘지. 대전국립현충원은 보훈처에서 서울국립현충원은 국방부에서 관리한다. 관리 주체가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명해 계시는 보훈의 성지”로, 국립서울현충원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있는 민족의 성지”라고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전을 찾아 뜻을 조합하면 현충顯忠이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을 높이 드러낸다”는 뜻이니, 현충을 어떤 관점으로 드러내는가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전쟁무기를 중심으로 전시를 하고 있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이 국방부 소속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그 현충의 차이가 조금은 더 실감난다. (그 이름부터 좀 바꿔 봅시다. 세상에! 전쟁을 기념한다니...)
이번에 찾은 국립서울현충원은 그 부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어서 좀 놀랐다. 더러 승용차를 타고 추모를 하러 가는 이들이 눈에 띄어서 왜 저러나 싶었는데, 다니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현충원을 안내한 김학규(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님의 말씀 중 몇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살아서의 계급적 지위가 묘역 조성에도 그대로 반영돼 구역을 나누고 규모를 달리했다, 나라를 위한 뜻에 차별을 둔 것이니 고쳐야 한다.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했던 관리 주체에 따른 문제와도 결부돼 있다. 김 소장의 얘기는 이렇다.
“광주에 있는 5.18국립묘지에 당시 항쟁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시민들이 안장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5.18민주화운동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국립묘지에 묻여 있는 묘한 형국이다. 특히 계엄군 묘비 뒷면에 새겨진 ‘1980년 5월 ○○일 광주에서 전사’라는 부분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어서 정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는데, 40년만인 2020년 12월 28일 마침내 ‘순직’으로 변경된 묘비로 교체되었다. 또한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17계엄군의 묘비가 지난 40년간 ‘전사’라고 씌어 있어 역사 왜곡의 현장 역할을 했다면,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에 ‘순직’이라고 씌어 있는 묘비 역시 역사 왜곡의 현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경찰묘역에는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경국장으로 광주전남지역 치안 책임자 안병하 경무관이 안장돼 있다. “경찰이 더 이상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경찰에게 비무장을 지시했던 그는 신군부에게 고문과 강제 사직을 당하고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방침에 따라 경찰 기동대의 무기를 회수했던 이준규 목포경찰서장도 안장돼 있다. 그 역시 신군부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전사 연도별로 묻힌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의 묘비를 보면서는 기분이 착잡하다. 장인어른은 베트남 전쟁에서 생존해 돌아오셨으나 뇌출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고엽제 피해자로 약간의 국가 도움을 받았으나, 내가 당신과 쌓아가고 있었던 좋은 일들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백마부대로 참전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 진실을 함께 찾고 싶었으나 고작 몇 장의 사진만 보았을 뿐이다. 물론 내가 아버지와 정치적 의견에 평행선을 긋고 있듯 장인어른과도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비록 얼굴을 붉히더라도 기회는 있었을 텐데... 전쟁은 그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빈 묫자리도 더러 보인다. 독립유공자로 묻혀 있다 가짜임이 드러나 파내 간 곳이다. 거짓과 조작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묘지를 이장해 가지 않는 뻔뻔한 이들도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 현장도 볼 수 있다. 남편과 동지로서 함께독립운동을 했는데 남편의 배우자로만 기록돼 합장된. 친일장교의 이력이 뚜렷하나 국군창설에 기용돼 장군까지 해먹은 이들도 눈에 띈다. 김학규 님은 “지금도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12명의 무덤이 있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기준으로는 74명의 친일파 무덤이 있다”고 한다.
현충원의 규모는 몇날 며칠을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크다. 이번 발걸음으로는 앞으로 탐방을 해야 할 동기를 얻은 셈이다. 다른 대통령의 무덤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크고 현충원 중심부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박정희의 묘는 다음에 가 보아야겠다. 김학규 님은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를 떠나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들의 죽음은 모두 고귀하다는 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조치로 이해된다며 미국은 대통령, 장군, 장교, 일반 사병 등 안장 대상자에게 4.49제곱미터라는 동일한 묘지 면적을 제공하고 있다”고 들려 주었다. 죽어서도 차별이라며 전면적인 차별 철폐가 필요하다고 덧붙이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에 따라 그 공동체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번에 현충원을 다녀오면서 다시 한번 느끼는 점이다.
- 풀씨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
한국전쟁 온라인 전시관을 소개드린다. 전쟁기념관이나 현충원은 현장학습지가 되기도 한다. 관람객은 국가주의 시각의 전시 서사에 그대로 노출된다. 전시물들, 전쟁무기, 기록들은 폭력과 공포, 죽음을 탈색시킨다. 관람객이 평화의 길로 들어서기는 쉽지 않다. 이와는 달리 아래 소개드리는 온라인 전시관은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마주한다. 전쟁과 평화는 나란히 설 수 없다. 전쟁은 나의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그것이 끝나서도 살아남은 자의 삶에 파고들어 전쟁의 공포를 왜곡하고 변주한다.
http://restricted.or.kr/
이 전시관은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에서 개설한 것이다.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전시 해설을 요청할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료이다. 온라인 전시관의 전시 취지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
흔히 전쟁 지도부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전쟁을 관찰한다고 간주한다. 회의실에 놓인 거대한 상황판 주변에 둘러앉아 작전과 대책을 논의하던 사람들. 그들이 상황판을 통해 바라보았던 전쟁의 모습이 그대로 국가의 공식기억이 되었다. 본 전시는 한국전쟁을 그러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망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쟁 지도부가 허락하지 않았던, 외면하려 했던 전쟁의 모습에 집중하려 했다.
1부 ‘불가능한 피란’에선 피란, 폭격, 학살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꾸렸다. 공산주의의 압제를 피해 떠난 ‘자유 피란민’이라고 치켜세워졌던 피란민들은 과연 길 위에서 어떤 ‘자유’의 모습을 만났을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량폭격의 모습은 스펙터클로 묘사되지만, 그 피폭지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국가는 어떻게 민간인학살과 같은 전쟁범죄의 가해자가 되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을 먼저 품고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의 고통을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전시의 내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2부는 ‘전쟁을 통과하는 10개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1부의 전시 내용에 보다 깊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와 1부에서 다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았다. 10개의 방의 이름은 각각 어떤 무덤, 남겨진 사람들, ‘부역자’, ‘위안부’, 어떤 폭격, 고지전, 노무자, 반란자1, 반란자2, 불러보는 이름이다. 전쟁을 통과한 이들의 흔적, 이름, 목소리, 얼굴, 필체 등은 그들이 홀로 감내해왔던 전쟁의 기억을 바깥으로 표출해낸 기록이자 ‘말 걸기’다. 우리가 그들 개개인의 기록을 마주하고, 읽고, 듣고, 감각하고, 거기에 응답한다면 그들의 기록은 우리의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디 본 전시가 그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목소리에 조금의 숨통이라도 터주기를 바란다. 그 목소리를 듣게 될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