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트 교육’에 저항한 김철수 열사의 인권적 외침과 교육 화두
배이상헌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엄연한 학생입니다. 제가 왜 그런 로보트 교육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더 이상 그런 취급을 받느니 지금의 교육을 회피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열사의 ‘로보트 교육’ 외침
1991년 5월 29일 김철수 열사가 병상에서 녹음한 유언의 전문 중 열사가 하고픈 이야기의 핵심이 위의 문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성고 교정에 조성된 열사 동상의 책 이름은 ‘참교육’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한반도 지도에 담긴 열사의 필체로 남겨진 유언은 ‘진실된 삶’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나는 열사의 유언에서 위의 언급이 계속 외면되는 것을 볼 때마다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열사가 친구들과 이 땅의 교육 주체들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의 시민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현재의 학교의 본질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로보트 교육’이었습니다.
열사가 친구들 앞에서 쓰러졌던 5월 18일부터(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병상에서 간호한 친구들에게 유언을 남기겠다고 요청하여 육성을 녹음했던 5월 29일까지 수많은 생각과 말들이 열사의 마음을 스쳤겠지만, 열사가 엄선한 메시지는 ①학교가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라고 강요한다는 것이고, ②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마땅한 것은 지금의 교육을 회피하는 것, 지금의 교육을 거부하는 것, 지금의 학교를 인간의 학교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열사의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엄선된 메시지입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했던 이야기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말하며 기억하고 예수 구원자의 운명과 실존을 이해하는 주요한 화두로 삼습니다.
나는 우리가 김철수 열사를 기억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열사의 유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열사의 유언은 죄송스럽지만 예수의 가상칠언보다 더욱 준비된 메시지이며, 분신하기까지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열사에게 가장 치열했던 투쟁의 순간을 집약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정말이지 화마의 고통과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열사가 자신이 살아왔던 삶과 자신의 학교 경험, 그리고 이 땅의 거대 권력의 본질과 민주화 투쟁의 큰 흐름 속에 자신의 투쟁을 적극 위치 지은, 너무도 가슴 아프고 너무도 위대한 유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열사를 생전에 함께 접하고 어울렸던 벗들에게 이 유언은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하게 가정하면 이 유언이 없어도 기억 속에 소중했던 ‘철수’이고, 이 유언이 없어도 그의 아픈 죽음의 까닭을 마음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사의 죽음 앞에 자신의 투쟁적 삶의 그 모든 것을 동일시하며 달려왔던 전남의 일천, 광주의 일천, 합하여 2천의 참교육선봉대에게 열사의 유언은 1991년 5월 자신의 투쟁과 자신의 다짐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튼튼한 언어일 것이며, 또 전국의 중·고등학생운동 주체들에게 열사의 유언은 열사의 취지만큼 당시 학생운동의 보편적 대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모두의 영혼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로보트 교육’의 의미
‘로보트 교육’은 열사가 언급한 ‘인간교육’과 정확히 대칭되는 표현입니다.
전교조가 참교육을 민족민주인간화의 원리로 설명했지만 그 세 가지 중 가장 애매하고 포괄적인 느낌으로 전달되어 사용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쓰였던 것이 ‘인간화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의 부정으로서 현실 진단의 언어는 ‘비인간화’였습니다.
‘비인간화’가 교육 현실을 언급함인지, 그 결과를 말함인지 체계적으로 진단된 적은 없습니다. 열사는 이를 ‘로보트 교육’이라 명명합니다.
열사의 언어는 학생의 언어입니다. 학생의 위치에서 열사 자신의 위기이며, 동료 벗들의 위기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세월이 길면 길수록 학생들은 점점 인간의 형상에서 자기 영혼을 상실한 로봇으로 귀착되는데, 아마 요즘의 용어로 말하면 ‘좀비’라는 표현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당시의 의미로 로봇은 창의성이 파괴된, 그래서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내맡기고 권력을 가진 자의 요구에 따라 생각하고 적응하기 급급합니다. 여기서 권력이란 한편으로 힘 있는 자를 말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질서를 말함인데 당연히 학생은 힘과 질서에 의해 조작 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린 ‘군중화’된 존재로서의 학생입니다.
당연히 로봇의 학교, 로봇의 교육은 대화가 없는 학교입니다. 대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화가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학교입니다. 대화가 없는 학교는 곧 자치활동이 발 디딜 틈 없는 학교이며, 참여의 주체로서, 정치의 주체로서 학생을 발견하지 못하는 학교입니다.
김철수 열사는 강경대 열사가 쇠파이프에 맞아 처참히 사망하고, 박승희 열사가 분신하여 전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잇따라 열사들이 분신하는 가운데 보성고등학교 학생회의 5.18기념식이 허락되지 않고 학생부장과 교장에 의해 철저히 묵살되는 상황에 분노하였으며, 학생회 행사를 가까스로 성취하는 과정들을 안타까움과 긴장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한국 사회의 반민주적 작태와 처절한 저항, 그리고 학교 안에서 뻔뻔한 교육 권력의 작태를 바라보며 열사 자신이 온몸으로 항거하고 맞서는 것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로보트 교육’은 학생회의 자치권을 부정하는 학교의 본질이며, 교육이기를 포기한 학교의 민낯을 오로지 한 단어로 정리한 열사의 개념입니다. 입시 교육, 자본주의 종속 노동교육, 반민중적 반민족적 교육은 각각의 독립된 자율성을 갖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학생을 오로지 로봇으로 귀결시키고자 전개되는 총체적 시스템이며, ‘왜 학교를 다니는가?’ ‘왜 공부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그 답이 로봇이라면 열사는 철저히 그러한 학교를 거부해야 한다고, 회피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로보트 교육’에 대한 고발의 대상은 열사에게 어른이 아니고, 어른들 중 양심 세력이 아니고, 바로 열사의 친구들, 후배들, 학생들의 자각으로 ‘로보트 교육’을 깨달아서 스스로 이 ‘로보트 교육’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너희 언제까지 이런 교육을 받을래?”라는 열사의 외침은 ‘로보트 교육’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열사의 문장이며, 간단명료한 판단입니다.
학생열사와 참교육, 교사운동의 시선
‘보호의 대상으로서 학생’과 ‘주체로서의 학생’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참교육 운동의 고민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며, 주체로서 성장하는 생명의 원리에 부합하기 위하여 학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교사운동은 그것을 집단담론으로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의 부재는 한국 사회 내부의 인권사상의 집단적 현실이며, 교사운동은 이로부터 자유롭거나 혹은 계몽적 역할을 자임할 수 있는 내적 공감대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한국 공교육에 대해 열사가 ‘로보트 교육’이라 진단함은 교사운동의 참교육 실천 논리와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고발이기에 학교가 형성하는 유익한 효과와 가치만을 생각하고, 학교의 폐해와 상처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언급한들 도덕적 수준의 자책감에서 언급이다) 참교육 실천 논리로는 계량하기 어려운 접근입니다.
교사 개개인의 다양한 참교육실천을 통해 그 유익성을 양적으로 축적하여 좋은 인간이 된다고 기대하는 관성적인 참교육론으로는 도무지 학생의 상처와 파괴, 그것의 내면적 심각성을 교사운동은 결코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창조적 사고, 학생의 자치활동, 학생의 정치적 본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학생집단활동의 교육적 본질에 대해 고상한 이론으로나 설파할 뿐 그것이 현재의 ‘살인교육’, ‘로봇교육’에 대한 구체적으로 유의미한 처방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결코 담론화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권학교, 자치학교, 시민학교
‘로보트 교육’이 학생의 생존권적 교육에 대한 질문이고 즉각적 실천을 요청하는 개념이라면 열사의 뜻을 계승하는 주체들에게 이는 담론운동의 방법과 학교 개혁론에 대한 구체적 도전으로 품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로보트 교육’은 학교 시스템, 학교 내 존재 방식을 뒤집는 길을 묻는 질문입니다.
학교가 담는 교육 내용의 문제이거나, 개별 교사의 교육 방법, 교육관과 윤리의 문제가 아닌, 학교 내 학생의 존재 방식, 학교 내 학생 개체가 아닌 학생 집단의 존재 방식으로서 교육 방법론의 문제로 길을 열어야 합니다.
열사의 ‘로보트 교육’에 대한 회피가 학교에 대한 해체론인지, 학교에 대한 개혁론인지에 대한 질문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학교에 대한 해체론이 아니라면, 2010년대 이후 청소년인권운동의 학교 개혁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반성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능적 분리주의를 전제하여, 학교 개혁론은 교사운동 주체가 담당할 문제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은 단지 인권에 대한 감시자로서 역할에 충실할 것인가에 대해서 진전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인권학교와 인권조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막연한 상관성보다 실천 방법론으로서 양자의 관계가 짚어져야 합니다. 학교 개혁론의 무기가 장착된다면 인권학교와 인권조례는 좀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자치와 시민학교 등에 대한 입체적 패러다임이 참교육운동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사로서의 요구이며, 사실 이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의 교육사상운동으로서 인권사상이 맞닿아서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통상 대안교육운동은 학부모 일반의 교육 사상에 대한 질문으로서 그 근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권 사상이 인간 형성의 교육사상으로서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시민의 가슴을 흔들 수 있는 운동의 패러다임이 요청됩니다.
이 글은 다음 행사의 발제문입니다.
[집담회] 2024, 학교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일시 : 2024년 6월 1일 오후 3시
장소 : 광주YMCA
‘로보트 교육’에 저항한 김철수 열사의 인권적 외침과 교육 화두
배이상헌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엄연한 학생입니다. 제가 왜 그런 로보트 교육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더 이상 그런 취급을 받느니 지금의 교육을 회피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열사의 ‘로보트 교육’ 외침
1991년 5월 29일 김철수 열사가 병상에서 녹음한 유언의 전문 중 열사가 하고픈 이야기의 핵심이 위의 문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성고 교정에 조성된 열사 동상의 책 이름은 ‘참교육’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한반도 지도에 담긴 열사의 필체로 남겨진 유언은 ‘진실된 삶’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나는 열사의 유언에서 위의 언급이 계속 외면되는 것을 볼 때마다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열사가 친구들과 이 땅의 교육 주체들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의 시민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현재의 학교의 본질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로보트 교육’이었습니다.
열사가 친구들 앞에서 쓰러졌던 5월 18일부터(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병상에서 간호한 친구들에게 유언을 남기겠다고 요청하여 육성을 녹음했던 5월 29일까지 수많은 생각과 말들이 열사의 마음을 스쳤겠지만, 열사가 엄선한 메시지는 ①학교가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라고 강요한다는 것이고, ②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마땅한 것은 지금의 교육을 회피하는 것, 지금의 교육을 거부하는 것, 지금의 학교를 인간의 학교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열사의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엄선된 메시지입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했던 이야기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말하며 기억하고 예수 구원자의 운명과 실존을 이해하는 주요한 화두로 삼습니다.
나는 우리가 김철수 열사를 기억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열사의 유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열사의 유언은 죄송스럽지만 예수의 가상칠언보다 더욱 준비된 메시지이며, 분신하기까지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열사에게 가장 치열했던 투쟁의 순간을 집약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정말이지 화마의 고통과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열사가 자신이 살아왔던 삶과 자신의 학교 경험, 그리고 이 땅의 거대 권력의 본질과 민주화 투쟁의 큰 흐름 속에 자신의 투쟁을 적극 위치 지은, 너무도 가슴 아프고 너무도 위대한 유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열사를 생전에 함께 접하고 어울렸던 벗들에게 이 유언은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하게 가정하면 이 유언이 없어도 기억 속에 소중했던 ‘철수’이고, 이 유언이 없어도 그의 아픈 죽음의 까닭을 마음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사의 죽음 앞에 자신의 투쟁적 삶의 그 모든 것을 동일시하며 달려왔던 전남의 일천, 광주의 일천, 합하여 2천의 참교육선봉대에게 열사의 유언은 1991년 5월 자신의 투쟁과 자신의 다짐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튼튼한 언어일 것이며, 또 전국의 중·고등학생운동 주체들에게 열사의 유언은 열사의 취지만큼 당시 학생운동의 보편적 대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모두의 영혼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로보트 교육’의 의미
‘로보트 교육’은 열사가 언급한 ‘인간교육’과 정확히 대칭되는 표현입니다.
전교조가 참교육을 민족민주인간화의 원리로 설명했지만 그 세 가지 중 가장 애매하고 포괄적인 느낌으로 전달되어 사용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쓰였던 것이 ‘인간화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의 부정으로서 현실 진단의 언어는 ‘비인간화’였습니다.
‘비인간화’가 교육 현실을 언급함인지, 그 결과를 말함인지 체계적으로 진단된 적은 없습니다. 열사는 이를 ‘로보트 교육’이라 명명합니다.
열사의 언어는 학생의 언어입니다. 학생의 위치에서 열사 자신의 위기이며, 동료 벗들의 위기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세월이 길면 길수록 학생들은 점점 인간의 형상에서 자기 영혼을 상실한 로봇으로 귀착되는데, 아마 요즘의 용어로 말하면 ‘좀비’라는 표현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당시의 의미로 로봇은 창의성이 파괴된, 그래서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내맡기고 권력을 가진 자의 요구에 따라 생각하고 적응하기 급급합니다. 여기서 권력이란 한편으로 힘 있는 자를 말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질서를 말함인데 당연히 학생은 힘과 질서에 의해 조작 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린 ‘군중화’된 존재로서의 학생입니다.
당연히 로봇의 학교, 로봇의 교육은 대화가 없는 학교입니다. 대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화가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학교입니다. 대화가 없는 학교는 곧 자치활동이 발 디딜 틈 없는 학교이며, 참여의 주체로서, 정치의 주체로서 학생을 발견하지 못하는 학교입니다.
김철수 열사는 강경대 열사가 쇠파이프에 맞아 처참히 사망하고, 박승희 열사가 분신하여 전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잇따라 열사들이 분신하는 가운데 보성고등학교 학생회의 5.18기념식이 허락되지 않고 학생부장과 교장에 의해 철저히 묵살되는 상황에 분노하였으며, 학생회 행사를 가까스로 성취하는 과정들을 안타까움과 긴장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한국 사회의 반민주적 작태와 처절한 저항, 그리고 학교 안에서 뻔뻔한 교육 권력의 작태를 바라보며 열사 자신이 온몸으로 항거하고 맞서는 것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로보트 교육’은 학생회의 자치권을 부정하는 학교의 본질이며, 교육이기를 포기한 학교의 민낯을 오로지 한 단어로 정리한 열사의 개념입니다. 입시 교육, 자본주의 종속 노동교육, 반민중적 반민족적 교육은 각각의 독립된 자율성을 갖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학생을 오로지 로봇으로 귀결시키고자 전개되는 총체적 시스템이며, ‘왜 학교를 다니는가?’ ‘왜 공부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그 답이 로봇이라면 열사는 철저히 그러한 학교를 거부해야 한다고, 회피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로보트 교육’에 대한 고발의 대상은 열사에게 어른이 아니고, 어른들 중 양심 세력이 아니고, 바로 열사의 친구들, 후배들, 학생들의 자각으로 ‘로보트 교육’을 깨달아서 스스로 이 ‘로보트 교육’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너희 언제까지 이런 교육을 받을래?”라는 열사의 외침은 ‘로보트 교육’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열사의 문장이며, 간단명료한 판단입니다.
학생열사와 참교육, 교사운동의 시선
‘보호의 대상으로서 학생’과 ‘주체로서의 학생’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참교육 운동의 고민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며, 주체로서 성장하는 생명의 원리에 부합하기 위하여 학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교사운동은 그것을 집단담론으로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의 부재는 한국 사회 내부의 인권사상의 집단적 현실이며, 교사운동은 이로부터 자유롭거나 혹은 계몽적 역할을 자임할 수 있는 내적 공감대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한국 공교육에 대해 열사가 ‘로보트 교육’이라 진단함은 교사운동의 참교육 실천 논리와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고발이기에 학교가 형성하는 유익한 효과와 가치만을 생각하고, 학교의 폐해와 상처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언급한들 도덕적 수준의 자책감에서 언급이다) 참교육 실천 논리로는 계량하기 어려운 접근입니다.
교사 개개인의 다양한 참교육실천을 통해 그 유익성을 양적으로 축적하여 좋은 인간이 된다고 기대하는 관성적인 참교육론으로는 도무지 학생의 상처와 파괴, 그것의 내면적 심각성을 교사운동은 결코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창조적 사고, 학생의 자치활동, 학생의 정치적 본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학생집단활동의 교육적 본질에 대해 고상한 이론으로나 설파할 뿐 그것이 현재의 ‘살인교육’, ‘로봇교육’에 대한 구체적으로 유의미한 처방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결코 담론화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권학교, 자치학교, 시민학교
‘로보트 교육’이 학생의 생존권적 교육에 대한 질문이고 즉각적 실천을 요청하는 개념이라면 열사의 뜻을 계승하는 주체들에게 이는 담론운동의 방법과 학교 개혁론에 대한 구체적 도전으로 품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로보트 교육’은 학교 시스템, 학교 내 존재 방식을 뒤집는 길을 묻는 질문입니다.
학교가 담는 교육 내용의 문제이거나, 개별 교사의 교육 방법, 교육관과 윤리의 문제가 아닌, 학교 내 학생의 존재 방식, 학교 내 학생 개체가 아닌 학생 집단의 존재 방식으로서 교육 방법론의 문제로 길을 열어야 합니다.
열사의 ‘로보트 교육’에 대한 회피가 학교에 대한 해체론인지, 학교에 대한 개혁론인지에 대한 질문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학교에 대한 해체론이 아니라면, 2010년대 이후 청소년인권운동의 학교 개혁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반성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능적 분리주의를 전제하여, 학교 개혁론은 교사운동 주체가 담당할 문제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은 단지 인권에 대한 감시자로서 역할에 충실할 것인가에 대해서 진전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인권학교와 인권조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막연한 상관성보다 실천 방법론으로서 양자의 관계가 짚어져야 합니다. 학교 개혁론의 무기가 장착된다면 인권학교와 인권조례는 좀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자치와 시민학교 등에 대한 입체적 패러다임이 참교육운동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사로서의 요구이며, 사실 이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의 교육사상운동으로서 인권사상이 맞닿아서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통상 대안교육운동은 학부모 일반의 교육 사상에 대한 질문으로서 그 근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권 사상이 인간 형성의 교육사상으로서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시민의 가슴을 흔들 수 있는 운동의 패러다임이 요청됩니다.
이 글은 다음 행사의 발제문입니다.
[집담회] 2024, 학교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일시 : 2024년 6월 1일 오후 3시
장소 : 광주Y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