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로 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지듯
반갑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무렵에야 인사를 드립니다. 2023년, 교육, 공동체, 벗, 부산, 이사 우수경입니다. 저 일곱 개의 단어 중에 ‘이사’라는 직함으로 인해 이렇게 벗들에게 편지도 쓰게 되네요. 이사라는 직함이 지닌 힘이 어찌나 강한지 올해 부산에서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도 다시 시작했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부산 벗들 함께 합시다^^.
편지를 쓰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니 이사가 되고 나서 새삼, 진짜(?) 교육공동체 벗이 된 것이 같아요. 왜냐하면 벗들과 삶을 나누게 되었으니까요. 올해 이사 벗들의 삶터를 순회하며 이사회를 하면서 벗들의 삶에 한층 가까워졌어요. 서울의 편집국을 시작으로 전 이사장 최은숙 벗의 삶터인 전북 전주의 ‘빵과 장미’, 서울 전유미 벗의 ‘까페 본주르’, 충남 서산 김훈태 벗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에서 이사회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한층 삶이 여유로워지고 풍성해지는 걸 느꼈어요. 벗을 만나러 여행하는 기분으로 부산을 떠나 다음날 서둘러 귀가할 때면 속은 느낌이지만, 일상에서 꿈꾸던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이사회였습니다. 제 삶은 《오늘의 교육》에서 이야기하는 삶과 많은 부분이 달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기만 하다가 이제사, 진짜 교육공동체 벗을 만난 것 같아요.
문득 ‘학교에서는 삶을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 점점 더 삶과 괴리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밤이면 손가락이 많이 아린데 학교에서 컴퓨터 자판을 너무 두들겼나 봐요. (그전엔 눈이 시렸어요.) 그만큼 학생들과 직접 부대끼는 시간은 많이 줄었을 테죠.
요즘 학교의 풍경은 이래요. 정치적 중립을 강제해 학생들이 교원평가에 ‘교사가 정치적 발언을 한다’고 적으면 그 학교에 감사가 바로 나와요. 학생들의 인적 사항을 물을 수 없어 학기 초 학생실태조사도 하면 안 되고요. 그래서 지필고사 결과를 학생들이 납득할 수 있게 객관식 문제를 오류 없이 출제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처럼 느껴지곤 해요.
학생들이 교과서나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무척 난감한 일이에요. 학기 말, 학년 말이면 학생들에게 “이게 네 점수 맞지?” 하고 확인하는 작업만 반복하는 것 같거든요. 올해도 학생들에게 보여 주기 전에 “내가 (네게) 보여 주는 점수가 맞아!” 하며 기록하고 있으니, 한숨만 더 깊어집니다. 학생들을 배움으로 이끌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에 분노가 막 솟구쳐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만의 모습일까요? 우리는 이런 일을 거부할 수는 없는 걸까요?
갈수록 업무상 필요한 서류 작업이 많아지니 정작 교사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언가 싶어요. 혼자서 끙끙대던 교육 실험들도 내가 안 하면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요.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2019년 2월 학교를 떠날 때도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유는 기간제 교사로서의 한계와 인문계고의 교육 방침과 진학 교육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소박하게 살자고 결심했어요. 결국 세상의 온갖 쓴맛을 보고 말았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쩔쩔매고 있네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사립 특성화고에 근무하고 있는데 새삼스러운 것들이 많아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과 조금은 다른 학생들의 삶을 마주하며, 제가 전부라고 여겼던 사회의 모습도 반쪽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특성화고에서 근무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느끼지 못했을 것들이 매우 많아요.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서 이 글에서는 생략할게요.
대신 올해 생명존중문화 프로젝트를 한답시고 학생들과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싶어요. 첫 마음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와 어르신들의 셈법(?)에 대한 것이에요.
여고생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권하는 것 같아 배냇저고리는 만들고 싶은 학생들만 만들게 했어요.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게 했고요. 다 만든 배냇저고리는 자기가 갖거나 기부하기로 했는데 대부분 자기가 갖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기부 물품은 학생들이 만든 배냇저고리와 편지, 그리고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방법이 담긴 안내서와 배냇저고리 제작 키트로 설계했어요. 안내서에는 한복 기능대회에서 수상한 우리 학교 학생이 직접 배냇저고리 만드는 법을 설명하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주소도 넣었어요. 그런데 기부를 약속한 학생들이 한 땀 한 땀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그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욕심이 생긴 거예요. 자기가 가지면 안 되느냐고 묻더군요. 기부처가 3곳이었는데 난감했어요. 삶을 나누는 것도 내공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네요.
이번 프로젝트는 나이가 지긋한 침선장 님과 명예 퇴직한 선생님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실현 가능했어요. 저는 침선장 님이 학생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다른 반 친구들과도 나누고 싶었어요. 그저 베풀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걸 느꼈거든요. 학생들을 만나는 삶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요.
소위 MZ 세대로 불리는 요즘 친구들은 남에게 신세를 지고 싶어 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주고받는 관계에 익숙한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런 소소한 계산법이 낯설지 않은데, 어린 학생들일수록 그런 셈법이 더 세밀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르신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처음에는 무척 낯설어하더군요. 젊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넉넉한 마음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는 모습들을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바로 조건 없는 사랑, 환대의 삶인가 싶었어요.
그렇다면 교육공동체 벗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일까? 전국의 벗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한동안 계속 고민하다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어요. 수면 위로 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파동이 일어나 잔잔한 물결이 퍼지고 다시 드넓은 물에 섞이는 장면이었어요. 우리 벗들의 역할이 바로 이 물 한 방울인 것 같아요. 잔잔한 동심원으로 파동을 일으키는. 그래서 맑은 물 한 방울은 여기저기서 모여 한 방울씩 한 방울씩 계속 떨어져야 하고 그 파동 또한 이내 흩어져 버리면 안 되겠죠. 아마 벗의 다른 이사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일으키는 파동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내년엔 정부의 예산 축소로 온갖 지원이 줄어든다고 하고 경기 침체로 출판 매출도 30% 가량 감소할 거라고 합니다. 이사로서 벗의 살림과 지속 가능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 교육공동체 벗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찾을까요? 벗 사무국은 현재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습니다. 좋은 책을 계속 발간하면 형편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고요. 벗 조합원 한 명 한 명이 필자가 되고 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육에 선한 영향력으로 파동을 일으키는 벗이 지속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교육공동체 벗을 만들 때, 그 첫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직 우리 벗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까요?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육’, ‘공동체’, ‘벗’은 우리의 전유물이 아닌데, 지금은 《오늘의 교육》을 펼칠 때만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쓸쓸하고 씁쓸합니다. 하지만 기죽지 맙시다. 좀 더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혼자서는 참 힘듭니다. 새해엔 더 자주 만나고 삶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서로 질문하고 삶을 공유하며 관계가 깊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 7기 이사회 이사
우수경 모심
수면 위로 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지듯
반갑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무렵에야 인사를 드립니다. 2023년, 교육, 공동체, 벗, 부산, 이사 우수경입니다. 저 일곱 개의 단어 중에 ‘이사’라는 직함으로 인해 이렇게 벗들에게 편지도 쓰게 되네요. 이사라는 직함이 지닌 힘이 어찌나 강한지 올해 부산에서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도 다시 시작했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부산 벗들 함께 합시다^^.
편지를 쓰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니 이사가 되고 나서 새삼, 진짜(?) 교육공동체 벗이 된 것이 같아요. 왜냐하면 벗들과 삶을 나누게 되었으니까요. 올해 이사 벗들의 삶터를 순회하며 이사회를 하면서 벗들의 삶에 한층 가까워졌어요. 서울의 편집국을 시작으로 전 이사장 최은숙 벗의 삶터인 전북 전주의 ‘빵과 장미’, 서울 전유미 벗의 ‘까페 본주르’, 충남 서산 김훈태 벗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에서 이사회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한층 삶이 여유로워지고 풍성해지는 걸 느꼈어요. 벗을 만나러 여행하는 기분으로 부산을 떠나 다음날 서둘러 귀가할 때면 속은 느낌이지만, 일상에서 꿈꾸던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이사회였습니다. 제 삶은 《오늘의 교육》에서 이야기하는 삶과 많은 부분이 달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기만 하다가 이제사, 진짜 교육공동체 벗을 만난 것 같아요.
문득 ‘학교에서는 삶을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 점점 더 삶과 괴리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밤이면 손가락이 많이 아린데 학교에서 컴퓨터 자판을 너무 두들겼나 봐요. (그전엔 눈이 시렸어요.) 그만큼 학생들과 직접 부대끼는 시간은 많이 줄었을 테죠.
요즘 학교의 풍경은 이래요. 정치적 중립을 강제해 학생들이 교원평가에 ‘교사가 정치적 발언을 한다’고 적으면 그 학교에 감사가 바로 나와요. 학생들의 인적 사항을 물을 수 없어 학기 초 학생실태조사도 하면 안 되고요. 그래서 지필고사 결과를 학생들이 납득할 수 있게 객관식 문제를 오류 없이 출제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처럼 느껴지곤 해요.
학생들이 교과서나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무척 난감한 일이에요. 학기 말, 학년 말이면 학생들에게 “이게 네 점수 맞지?” 하고 확인하는 작업만 반복하는 것 같거든요. 올해도 학생들에게 보여 주기 전에 “내가 (네게) 보여 주는 점수가 맞아!” 하며 기록하고 있으니, 한숨만 더 깊어집니다. 학생들을 배움으로 이끌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에 분노가 막 솟구쳐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만의 모습일까요? 우리는 이런 일을 거부할 수는 없는 걸까요?
갈수록 업무상 필요한 서류 작업이 많아지니 정작 교사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언가 싶어요. 혼자서 끙끙대던 교육 실험들도 내가 안 하면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요.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2019년 2월 학교를 떠날 때도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유는 기간제 교사로서의 한계와 인문계고의 교육 방침과 진학 교육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소박하게 살자고 결심했어요. 결국 세상의 온갖 쓴맛을 보고 말았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쩔쩔매고 있네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사립 특성화고에 근무하고 있는데 새삼스러운 것들이 많아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과 조금은 다른 학생들의 삶을 마주하며, 제가 전부라고 여겼던 사회의 모습도 반쪽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특성화고에서 근무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느끼지 못했을 것들이 매우 많아요.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서 이 글에서는 생략할게요.
대신 올해 생명존중문화 프로젝트를 한답시고 학생들과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느꼈던 점을 나누고 싶어요. 첫 마음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와 어르신들의 셈법(?)에 대한 것이에요.
여고생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권하는 것 같아 배냇저고리는 만들고 싶은 학생들만 만들게 했어요.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게 했고요. 다 만든 배냇저고리는 자기가 갖거나 기부하기로 했는데 대부분 자기가 갖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기부 물품은 학생들이 만든 배냇저고리와 편지, 그리고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방법이 담긴 안내서와 배냇저고리 제작 키트로 설계했어요. 안내서에는 한복 기능대회에서 수상한 우리 학교 학생이 직접 배냇저고리 만드는 법을 설명하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주소도 넣었어요. 그런데 기부를 약속한 학생들이 한 땀 한 땀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그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욕심이 생긴 거예요. 자기가 가지면 안 되느냐고 묻더군요. 기부처가 3곳이었는데 난감했어요. 삶을 나누는 것도 내공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네요.
이번 프로젝트는 나이가 지긋한 침선장 님과 명예 퇴직한 선생님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실현 가능했어요. 저는 침선장 님이 학생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다른 반 친구들과도 나누고 싶었어요. 그저 베풀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걸 느꼈거든요. 학생들을 만나는 삶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요.
소위 MZ 세대로 불리는 요즘 친구들은 남에게 신세를 지고 싶어 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주고받는 관계에 익숙한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런 소소한 계산법이 낯설지 않은데, 어린 학생들일수록 그런 셈법이 더 세밀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르신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처음에는 무척 낯설어하더군요. 젊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넉넉한 마음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는 모습들을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바로 조건 없는 사랑, 환대의 삶인가 싶었어요.
그렇다면 교육공동체 벗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일까? 전국의 벗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한동안 계속 고민하다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어요. 수면 위로 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파동이 일어나 잔잔한 물결이 퍼지고 다시 드넓은 물에 섞이는 장면이었어요. 우리 벗들의 역할이 바로 이 물 한 방울인 것 같아요. 잔잔한 동심원으로 파동을 일으키는. 그래서 맑은 물 한 방울은 여기저기서 모여 한 방울씩 한 방울씩 계속 떨어져야 하고 그 파동 또한 이내 흩어져 버리면 안 되겠죠. 아마 벗의 다른 이사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일으키는 파동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내년엔 정부의 예산 축소로 온갖 지원이 줄어든다고 하고 경기 침체로 출판 매출도 30% 가량 감소할 거라고 합니다. 이사로서 벗의 살림과 지속 가능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 교육공동체 벗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찾을까요? 벗 사무국은 현재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습니다. 좋은 책을 계속 발간하면 형편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고요. 벗 조합원 한 명 한 명이 필자가 되고 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육에 선한 영향력으로 파동을 일으키는 벗이 지속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교육공동체 벗을 만들 때, 그 첫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직 우리 벗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까요?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육’, ‘공동체’, ‘벗’은 우리의 전유물이 아닌데, 지금은 《오늘의 교육》을 펼칠 때만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쓸쓸하고 씁쓸합니다. 하지만 기죽지 맙시다. 좀 더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혼자서는 참 힘듭니다. 새해엔 더 자주 만나고 삶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서로 질문하고 삶을 공유하며 관계가 깊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 7기 이사회 이사
우수경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