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이정림
그림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와 내가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잘 보이는 곳에 적어 두며 자주 읽는 〈엄마의 20년〉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결국 육아란 아이와 나를 잘 독립시키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긴 과제라는 것이다. 시기에 맞춰 나의 역할도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서로를 잘 독립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지금은 20년 중 1/3을 지나는 시기에 있다. 그동안 참 많이 웃었고, 참 많이 울었다. 밤낮없이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일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고, 정답을 모르니 우왕좌왕하며 책에 매달리며 아이를 돌봐 왔다. 좋은 엄마라는 기준에 도달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20년의 1/3의 시간 동안 감정을 다스리는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무조건 받아 주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데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너무 화가 나고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를 때리기도 했다.
아이에게 체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때리며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더 큰 결심이 필요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체벌 거부 선언을 하고, 또 1/3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와의 관계는 예전보다 너무나 편안해졌다.
1/3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과정 동안 내가 노력했던 부분을 나누어 보고 싶다.
‘체벌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였나?’
생각해 보면 아이에게 화를 내던 원인은 아이가 아닌 나에게 있었다. 체벌하고 싶은 이유는 언제나 아이를 ‘통제’하고 싶은 마음에 있었다. ‘얼마나 아이를 잘 관리하나’ 평가하는 남들의 시선, 사회가 요구하거나 내가 원하는 ‘좋은 엄마’라는 기준이 맞물려 너무나 간절히 통제가 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한 번 아이를 정말 심하게 때린 적이 있다. 놀이터에서 큰아이가 동생을 괴롭혀서 집으로 돌아와 큰아이를 때렸다. 아이가 한 행동보다는 다른 엄마들에게 비추어지는 내 모습이 신경 쓰여서 아이에게 화를 냈다. “너 때문에 내 체면이 안 섰다. 어떻게 거기에서 네 동생에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 엄마가 뭐가 되냐.” 남의 시선에 대한 걱정과 부끄러움으로 아이를 때린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스트레스다. 누구 하나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쉬고 싶어도 쉬지 못했다. 둘째가 많이 칭얼대는 편인데, 남편이 “네가 자꾸 받아 주니까 더한다”고 말한다. 나는 고민하고 노력해서 체벌을 하지 않는 것인데, 아이를 “오냐오냐” 키운다고, “네가 잘못 키워서 그렇다”고 말하곤 한다. 내 육아의 첫 번째 감시자는 남편이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책임져야 할 사람임에도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을 감시하고 평가할 때 억울하다.
이렇듯 주변에서 육아의 책임을 엄마인 나에게 모두 돌리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 아이들에게 분노를 표현하게 될 때가 있었다.
‘어떤 노력들을 하였나?’
어느 날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 때린 행동에 대해 사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놀고 있던 아이를 불러서 물어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는 화나면 때리잖아”라고 했다. 일상적으로 꿀밤 등을 때려 왔던 것이다. “미안하다. 엄마가 앞으로는 정말 안 때릴게”라고 했다. 남편과도 “우리 앞으로 절대 때리지 말자”라고 이야기했다. 이렇듯 지난날의 잘못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적고 깨닫고 뉘우치는 과정을 겪어 왔다.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서 내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에 집 안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꾸기로 했다. 절대 그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낼 순 없었다. 육아서가 아닌 나를 돌보는 책을 보고, 좋아하는 취미를 찾고 운동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림책 토론도 열심히 했다. 아이의 문제를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고 기다려 주려 애썼다. 어린이를 시민으로, 독립된 인격체로 인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아이를 이해하려 열심히 어린이책을 읽고 동료 엄마들과 ‘책 토론’을 하는 사이, 아이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자라고 있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니 아이들에게 체벌하고 싶어지는 일도, 소리 지르는 일도 아주 많이 줄었다. 내가 나답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의 20년 육아의 숙제이자 화두이다.
〈엄마의 20년〉에서는 4~7세를 ‘엄마와 자식 사이의 황금기’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각각 7세와 9세. 지독하게 고집스럽던 유아기를 지나고 아직 사춘기를 조금은 멀리 앞두고 있는 나이다. 나는 이 날들을 마음껏 행복할 것이다. 아이들을 이해하려 더 열심히 책 토론을 하고, 청소년들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때는 ‘겹쳐 있던 아이와 나의 생을 따로 떼어 놓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쉽지 않음을 알아서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부단히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으면 체벌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나를 많이 괴롭힐 것이다. 많이 불안하지만 나를 믿어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활동, 고민들이 그 시기에 나에게 위로가 되어 줄 것이고, 지나침에는 브레이크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너무나 간절히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행복해지고 싶었던 나를 믿어 보기로 했다.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기획, 이희진·이윤승·하승우 외 씀(2019), 《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교육공동체 벗, 48~51쪽.

《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이정림
그림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와 내가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잘 보이는 곳에 적어 두며 자주 읽는 〈엄마의 20년〉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결국 육아란 아이와 나를 잘 독립시키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긴 과제라는 것이다. 시기에 맞춰 나의 역할도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서로를 잘 독립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지금은 20년 중 1/3을 지나는 시기에 있다. 그동안 참 많이 웃었고, 참 많이 울었다. 밤낮없이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일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고, 정답을 모르니 우왕좌왕하며 책에 매달리며 아이를 돌봐 왔다. 좋은 엄마라는 기준에 도달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20년의 1/3의 시간 동안 감정을 다스리는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무조건 받아 주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데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너무 화가 나고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를 때리기도 했다.
아이에게 체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때리며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더 큰 결심이 필요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체벌 거부 선언을 하고, 또 1/3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와의 관계는 예전보다 너무나 편안해졌다.
1/3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과정 동안 내가 노력했던 부분을 나누어 보고 싶다.
‘체벌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였나?’
생각해 보면 아이에게 화를 내던 원인은 아이가 아닌 나에게 있었다. 체벌하고 싶은 이유는 언제나 아이를 ‘통제’하고 싶은 마음에 있었다. ‘얼마나 아이를 잘 관리하나’ 평가하는 남들의 시선, 사회가 요구하거나 내가 원하는 ‘좋은 엄마’라는 기준이 맞물려 너무나 간절히 통제가 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한 번 아이를 정말 심하게 때린 적이 있다. 놀이터에서 큰아이가 동생을 괴롭혀서 집으로 돌아와 큰아이를 때렸다. 아이가 한 행동보다는 다른 엄마들에게 비추어지는 내 모습이 신경 쓰여서 아이에게 화를 냈다. “너 때문에 내 체면이 안 섰다. 어떻게 거기에서 네 동생에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 엄마가 뭐가 되냐.” 남의 시선에 대한 걱정과 부끄러움으로 아이를 때린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스트레스다. 누구 하나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쉬고 싶어도 쉬지 못했다. 둘째가 많이 칭얼대는 편인데, 남편이 “네가 자꾸 받아 주니까 더한다”고 말한다. 나는 고민하고 노력해서 체벌을 하지 않는 것인데, 아이를 “오냐오냐” 키운다고, “네가 잘못 키워서 그렇다”고 말하곤 한다. 내 육아의 첫 번째 감시자는 남편이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책임져야 할 사람임에도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을 감시하고 평가할 때 억울하다.
이렇듯 주변에서 육아의 책임을 엄마인 나에게 모두 돌리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 아이들에게 분노를 표현하게 될 때가 있었다.
‘어떤 노력들을 하였나?’
어느 날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 때린 행동에 대해 사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놀고 있던 아이를 불러서 물어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는 화나면 때리잖아”라고 했다. 일상적으로 꿀밤 등을 때려 왔던 것이다. “미안하다. 엄마가 앞으로는 정말 안 때릴게”라고 했다. 남편과도 “우리 앞으로 절대 때리지 말자”라고 이야기했다. 이렇듯 지난날의 잘못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적고 깨닫고 뉘우치는 과정을 겪어 왔다.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서 내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에 집 안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꾸기로 했다. 절대 그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낼 순 없었다. 육아서가 아닌 나를 돌보는 책을 보고, 좋아하는 취미를 찾고 운동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림책 토론도 열심히 했다. 아이의 문제를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고 기다려 주려 애썼다. 어린이를 시민으로, 독립된 인격체로 인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아이를 이해하려 열심히 어린이책을 읽고 동료 엄마들과 ‘책 토론’을 하는 사이, 아이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자라고 있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니 아이들에게 체벌하고 싶어지는 일도, 소리 지르는 일도 아주 많이 줄었다. 내가 나답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의 20년 육아의 숙제이자 화두이다.
〈엄마의 20년〉에서는 4~7세를 ‘엄마와 자식 사이의 황금기’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각각 7세와 9세. 지독하게 고집스럽던 유아기를 지나고 아직 사춘기를 조금은 멀리 앞두고 있는 나이다. 나는 이 날들을 마음껏 행복할 것이다. 아이들을 이해하려 더 열심히 책 토론을 하고, 청소년들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때는 ‘겹쳐 있던 아이와 나의 생을 따로 떼어 놓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쉽지 않음을 알아서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부단히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으면 체벌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나를 많이 괴롭힐 것이다. 많이 불안하지만 나를 믿어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활동, 고민들이 그 시기에 나에게 위로가 되어 줄 것이고, 지나침에는 브레이크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너무나 간절히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행복해지고 싶었던 나를 믿어 보기로 했다.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기획, 이희진·이윤승·하승우 외 씀(2019), 《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교육공동체 벗, 48~51쪽.